RPG 장르를 플레이하다보면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러운 정도만 아니라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스토리 속에서 플레이어 이외에도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활약하며, 때때로 인기가 있거나 아직 역할이 남은 등장인물은 속편에서도 이어서 등장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공상으로 꾸며진 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들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등장인물들의 매력은 때때로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RPG 장르 이외에서 만나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예를 들어 RTS 장르에서는 한국에서 사이버 민속놀이라 부를 수 있을만큼 큰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의 짐 레이너, 제라툴 등의 인물들이 게이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만 스타크래프트의 경우는 시스템상 일반 게임에서 영웅들을 만나볼 수 없었다는 부분이 아쉬웠다. 영웅들을 보다 조명한 것은 동사의 다른 RTS 게임 워크래프트 시리즈였다. 워크래프트에서는 아예 플레이어가 모집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영웅 유닛을 진영마다 배치하고 맵의 어딘가에 위치한 용병 캠프에서 고용할 수 있는 중립 영웅 유닛까지 추가하는 등 게임 속에서 영웅적인 등장인물의 면면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스타크래프트2 짐 레이너
아직 스타크래프트의 열기가 식지 않았을 이 시기, RPG처럼 만들어진 워크래프트3의 보너스 미션 듀로타 건국을 플레이하며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을 RPG에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상상은 현실이 되어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굉장한 반향을 일으키며 흥행가도에 올랐다.
오늘은 2022년 중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9.2 업데이트를 끝으로 마무리 될 하나의 워크래프트 사가를 회고하며 그간 하고 싶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등장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 워크래프트에서 이어진 영웅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이 다수 등장하나 플레이어는 그들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워크래프트의 세계인 아제로스에서 모험을 하는 필멸자의 입장으로 플레이한다. 필멸자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결국엔 세계의 위기에 함께 맞선다는 스토리가 주된 흐름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구가했던 인기는 비단 국내 MMORPG 게이머들에게는 혁신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여러 시스템만이 원인인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RTS 게임으로 친숙했던 워크래프트3의 영웅들을 MMORPG 세계에서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거나 진영에 따라 맞서고, 때로는 공투하기도 하는 그 자체를 즐겁게 여겼다.
지금은 이용자 수도 이전만큼이 아니고 각자 열중할 컨텐츠도 생기면서 PvP도 시큰둥한 상황이지만 당시엔 이런 유명한 영웅들이 수장으로 있는 각 종족 대도시를 침공하는 수장 파티도 심심찮게 보였다. 각 진영의 수장을 처치하는 파티가 결성되었을 때도 진영의 수장을 역임한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은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주며 플레이어들에게 하나의 목표로 자리잡기도 했다. 워크래프트3의 오크 캠페인에서 등장한 스랄을 처치하기 위해 모인 플레이어들이 오그리마 수장의 방에서 갈갈이 썰려나가면서도 저항하는 모습이나 당시에는 섭정 통치였던 스톰윈드보다 수도처럼 여겨졌던 아이언포지의 침공 등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을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상대한다는 것은 제법 로망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바리안 린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던 등장인물을 상대하고 쓰러뜨리는 과정은 플레이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오리지널에서는 중립 영웅 불의 군주를 바탕으로 한 불의 군주 라그나로스와 대적해 그를 쓰러뜨리고, 첫 확장팩 불타는 성전에서는 나이트 엘프 영웅으로 등장했고 넘치는 멋짐을 뿜어대던 악마사냥꾼 일리단을 쓰러뜨렸으며 불타는 성전과 함께 최전성기로 여겨진 리치 왕의 분노에선 워크래프트3 확장팩 프로즌쓰론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리치 왕 아서스를 쓰러뜨리기에 이른다. 물론 아서스를 쓰러뜨릴 때의 감동이 티리온 폴드링의 막타 스틸로 조금 깨지긴 했지만 워크래프트 사가에서 등장한 영웅들이 악역으로 나타나 플레이어가 수십 명 규모의 공격대로 이들을 무찌를 때의 감동은 굉장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RTS 워크래프트 시리즈부터 등장했던 영웅들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오픈 이후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소모되어 왔다. 워크래프트 사가의 영웅적인 존재들이 쓰러지면서 등장인물의 소모는 적에서 그치지 않고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수장들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얼라이언스의 수장들은 마그니 브론즈비어드가 광물로 변했다가 아제로스의 대변자로 돌아왔으니 실질적인 사망은 바리안 린 한 명으로 그쳤지만 호드는 스스로 물러난 스랄을 제외하고 가로쉬 헬스크림, 볼진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며 무대 밖으로 떠났다. 실바나스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타도할 대상으로 몰린 상황이다.
이렇듯 워크래프트 사가 출신의 등장인물들은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다.
9.2 최후의 적, 간수 조바알
■ 성장형 등장인물
워크래프트 사가 한 권의 대단원에 향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야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픈 이후 꽤 오랜 시간 플레이어인 필멸자 모험가들은 그저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이 주도하는 이야기를 거드는 역할 정도로 다뤄졌다. 그러던 플레이어가 점점 메인 스토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확장팩에서는 호드와 얼라이언스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평행세계의 드레노어라는 미지의 환경에서 전초기지 하나를 맡을 정도로 출세하는 등 진급이라고 볼 수 있는 모습을 연출로 플레이어의 활약을 보상해갔다.
그런 사이에 플레이어와 함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세계에 탄생해 몇 개의 확장팩을 거치며 성장한 등장인물들도 존재한다. 각각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나즈그림, 테일러다. 나즈그림은 리치 왕의 분노 시점에서 하사관으로 등장해 대격변, 판다리아의 안개에 걸쳐 진급하고 최종적으론 충성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적으로 돌아서는 극적인 등장인물이다. 플레이어와 함께 고락을 함께하며 진급한 동료같은 캐릭터가 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한 플레이어들도 제법 있었다. 한편 얼라이언스의 테일러는 그보다 조금 늦은 대격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바쉬르에서의 탐험에서부터 판다리아의 안개, 그리고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서 맞이하는 최후까지 나즈그림과 마찬가지로 세 개의 확장팩에 걸쳐 플레이어와 함께했다.
테일러의 최후
이들은 온전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끝을 본 등장인물이다. 비록 군단이나 어둠땅에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첫 등장부터 최후까지의 서사를 깔끔히 끝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태생의 등장인물이다. 다만 그 취급은 조금 아쉬웠다. 나즈그림이 비록 적이긴 해도 공격대 보스로 등장해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던 것과 달리 테일러는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확장팩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이미 사망한 상태로 발견하게 된다.
이들처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세계에서 태어난 캐릭터들도 분명 존재했다.
■ 새로운 영웅의 등장은 여기서 환영하라
아쉬운 것은 그들과 같은 성장형 등장인물이나 인상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등장인물이 이후로 딱히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토리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하는 MMORPG 장르로 17년을 운영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지속적으로 등장인물의 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새로운 피의 수혈은 매 확장팩에 추가되는 1회용 등장인물 정도의 임시방편에 그친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앞으로 서비스를 이어가는 한 계속되는 등장인물들의 소모는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맛을 들인 이야기 전개 방식은 거대한 악이 등장하거나 기존 등장인물이 타락하는 정도의 패턴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새로운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쌓을 때가 아닐까 싶다.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을 스토리에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늘 스토리 팬의 관심사 중 하나다. 하지만 이대로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갈수록 지우기가 어렵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 지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어쨌든 워크래프트 출신의 영웅들도 언젠가는 소진될 것이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출신의 캐릭터들로 이야기를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은 다시금 플레이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들을 쌓아갈 수 있을까?
스랄과 제이나, 이들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플레이어가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영웅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함께 이야기에 뛰어드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었지만 그들도 이제는 많이 소모되었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기존 등장인물들의 퇴장은 필연적이나 나즈그림과 테일러같이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플레이어들에게 인상을 남긴 새로운 등장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어둠땅의 마무리에 집중해야 하는 9.2 업데이트에서는 평행세계에서 함께 모험을 했던 광신자 이렐 총독같은 기존 인물이 등장할 여지가 적다. 사실상 어둠땅의 마무리 이후에나 새로운 등장인물 또는 기존 등장인물의 메인 스트림 합류를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에 적합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아제로스에 아웃랜드, 드레노어와 어둠땅까지. 우리는 17년 동안 많은 모험을 했다. 워크래프트의 영웅들과 만나고 싸웠으며 이별했다. 새해부터는 우리의 눈길을 다시금 잡아끌 새로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사가의 주역 탄생을 목도하고 싶다. 한 번의 확장팩만을 위함이 아닌 플레이어가 몰입할 수 일을만한 영웅의 탄생을.
조건희 / desk@gameshot.net | 보도자료 desk@gameshot.net